[도서요약]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 - 용광로를 지나 정금이 되는 이야기

[도서요약] 팀 켈러의 『고통에 답하다』 - 용광로를 지나 정금이 되는 이야기


어느 늦은 가을 저녁, 뉴욕 맨해튼의 제 연구실 문을 두드리던 한 젊은 여성의 주저하는 발걸음과 그 눈물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녀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월스트리트의 커리어를 쌓아왔고,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전형적인 현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청천벽력 같은 중병 소식 앞에 그녀가 쌓아 올린 세계는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 책상 앞에서 흐느끼며 울부짖었습니다.

“목사님, 제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죠?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나요? 이건 전혀 공평하지 않아요.”

그녀의 절규는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다루는 현대 문화의 거대한 결함과 무능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울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역사상 가장 안전하고 의학적으로 진보한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고통이라는 인생의 불청객 앞에서는 그 어떤 세대의 선조들보다 더 무력하게 무너지는 걸까요?

수십 년간 뉴욕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마주하며 제가 깊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현대 세속 사회는 우리에게 고통을 피하고, 관리하고, 제거하는 ‘기술’은 가르쳐 주었지만,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마주하고 ‘통과하는 법’은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을 회피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의 한복판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법(Walking with God)’이라는 깊은 영적 신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골짜기에서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파멸이 아닌 정화와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 깊은 사유의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1. 고통을 바라보는 현대 사회의 거대한 기만


우리가 고통 앞에서 이토록 취약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거의 모든 전통 문화와 종교는 고통을 인생의 당연한 ‘상수’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겼고, 불교는 삶의 본질 자체가 고뇌(苦)라고 가르쳤으며, 기독교는 타락한 세상에서 겪는 필연적인 시련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세계관 안에서 고통은 언제나 인격을 도야하고, 영혼을 정화하며, 더 고차원적인 진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세속 사회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고통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현대 문화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로 질병과 빈곤, 고통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오만한 낙관주의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 관점 아래에서 인생의 최고 목적은 오직 ‘개인의 행복과 안락, 그리고 자기만족’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고통은 인생의 목적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무의미한 침입자, 혹은 시스템의 실패나 기술적 오류로만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세계관에 따른 고통의 인식 차이

  • 전통적 세계관: 고통은 삶의 필연적인 동반자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 현대 세속적 세계관: 고통은 있어서는 안 될 오류이며, 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무의미한 파괴자일 뿐이다.

이러한 현대의 서사는 삶이 평탄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 이 얄팍한 세계관은 우리를 철저히 배신합니다. 고통에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이 찾아오는 순간 삶의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C.S. Lewis)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현대인들은 고통을 겪을 때 그 아픔 자체보다 “이 고통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더 깊이 절망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는 법에만 몰두하느라, 고통을 통해 영혼이 빚어지는 신비로운 과정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2. 불 시험과 용광로: 파멸이 아닌 정화를 위한 성경의 메타포


그렇다면 성경은 고통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결코 고통을 미화하거나 가볍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뇌하셨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느끼는 슬픔과 비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성도를 정금처럼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하고도 자비로운 도구로 묘사합니다. 그 대표적인 비유가 바로 ‘용광로(Furnace)’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택하였노라” (이사야 48:10)

베드로 사도 역시 성도들이 세상에서 겪는 시험을 가리켜 ‘불 시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용광로의 목적이 금이나 은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단단히 섞여 있는 불순물(찌끼)을 태워 없애고, 가장 순수한 정금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함입니다.

제 인생을 돌이켜보아도, 그리고 수많은 성도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아도 결코 변하지 않는 영적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겸손해졌을 때, 타인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신뢰를 회복했을 때는 언제나 인생의 가장 안락한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숨이 막힐 것 같은 고통의 터널을 지날 때였습니다.

안락함은 우리의 영혼을 영적 나태함으로 잠들게 하지만, 고통은 우리의 영혼을 세차게 깨웁니다. 불은 금을 없애지 못합니다. 오직 금을 둘러싸고 있던 불순물만을 태울 뿐입니다. 고통의 용광로는 우리가 그동안 신뢰하고 우상으로 삼았던 세상의 헛된 것들—재물, 평판, 커리어, 건강, 인간관계 등—이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신기루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불 속에서도 결코 타지 않을 영원한 바위이신 하나님 한 분께로 인도합니다.



3. 욥이 마주한 폭풍: ‘이유’에 대한 갈증에서 ‘임재’의 만족으로


우리가 고통의 한복판에 던져질 때, 우리의 이성은 본능적으로 하나의 질문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왜(Why)?”라는 질문입니다. “왜 하필 나인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비극을 겪어야 하는가?”

성경의 욥기는 이 처절한 질문에 대한 거대한 신학적 탐구 보고서와 같습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으나 아무런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모든 자녀와 재산, 그리고 자신의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의 곁에 찾아온 친구들은 전통적인 인과응보의 논리를 들이대며 “네가 죄를 지었으니 이런 벌을 받는 것”이라며 욥의 상처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철저히 욥의 편을 드시며, 고통을 도식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친구들의 논리가 완전히 틀렸음을 선언하십니다. 고통의 원인은 인간의 좁은 지혜와 인과론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 영역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 끝내 그가 고통받아야 했던 구체적인 ‘이유’를 단 한 마디도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하나님은 우주의 광대함과 창조 세계의 신비를 계시하시며 자신의 주권을 보여주셨습니다.

논리적이고 명쾌한 답변을 기대했던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 대목은 당황스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욥의 최종 반응을 보십시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며 깊은 위로와 평강을 얻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고통을 뒤집는 아주 중요한 영적 반전을 목격합니다. 고통의 순간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인과론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라는 점입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병의 원인을 복잡한 의학 용어로 친절히 설명해 줄 수 있지만, 그 지식이 환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정작 환자를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은, 밤새 곁에서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과 온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차가운 인생 설명서를 쥐여주는 분이 아닙니다. 친히 우리 손을 잡고 함께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시는 따뜻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4. 십자가라는 궁극의 대답: 고통의 신비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깊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시고 자비하시다면, 애초에 이런 비극과 고통을 막으실 수는 없었단 말인가? 도대체 왜 고통을 이 세상에 허용하셨는가?”

철학적으로 이 ‘신정론(Theodicy)’의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내어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 종교나 철학이 결코 제시하지 못하는 독보적이고도 압도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타 종교의 신들은 고통 저편의 초월적이고 안전한 세계에 앉아 인간의 멀고 먼 신음 소리를 방관하듯 바라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배신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조롱당하셨고, 마침내 가장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처형 도구인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분은 온 몸으로 고통을 겪으신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십자가는 고통당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웅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삶에 고통을 허용하시는 그 구체적이고 세밀한 이유는 여전히 다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최소한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혹은 내 아픔에 무관심해서 이 고통을 방치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냉담한 분이셨다면, 굳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어 그 모진 아픔을 대신 겪으실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는 대신 자신의 어깨에 시기 가시를 짊어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통에 대한 이론적 답변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신 하나님의 가장 뜨겁고 확실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5. 은혜의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세 가지 걸음


이제 이 깊은 십자가의 진리를 가슴에 품고,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고통의 터널을 걸어가야 할까요? 낙심과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와 영혼을 뒤흔들 때, 우리가 디뎌야 할 매우 실천적이고도 구체적인 세 가지 걸음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탄식하십시오 (Lament)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통 속에서 무조건 “감사합니다”, “믿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영적 강박관념에 시달립니다. 슬퍼하거나 의심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연약한 행동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시편을 보십시오. 시편의 절반 이상은 하나님을 향한 거친 탄식과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어느 때까지니이까?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악인이 형통합니까?”

성경적 탄식(Lament)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찢어진 아픔을 세상의 다른 헛된 곳에 쏟아놓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쏟아놓는 가장 격렬하고도 친밀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우십시오. 주님은 그 눈물을 병에 담으시는 분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고통은 우리의 영적 시야를 극도로 좁혀 놓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오직 내 아픔, 내 상처, 내 문제만 보이게 만들어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이때 우리는 기도의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도 좋습니다. 기도가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면 그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음 소리라도 내십시오.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말을 거는 그 행위 자체가 우리의 영혼이 어둠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영적인 방파제가 됩니다.


셋째, 장차 맞이할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바라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우리가 겪는 극심한 환난을 가리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가벼운)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이 말은 자칫 현실감 없는 잔인한 말로 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이 고통의 실체를 몰라서 가볍다고 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역시 누구보다 극심한 박해와 매 맞음, 파선과 굶주림, 그리고 평생을 괴롭힌 육체의 가시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환난을 가볍다고 말한 유일한 이유는, 장차 우리가 맞이할 영원한 천국의 영광이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무겁고 크기 때문입니다.


환난의 무게 (잠시, 가벼움) < 장차 올 영광의 무게 (영원, 지극히 중함)


이 땅에서의 100년 남짓한 삶은 영원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바다에 비하면 한 방울의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고통은 결코 최종 결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우리의 상처가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의 흔적이 될 눈부신 아침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결론: 용광로를 지나 정금으로 서기까지


글을 마치며, 다시 처음에 언급했던 그 젊은 여성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질병의 혹독한 계절을 지나며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의 터널을 묵묵히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제 연구실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외모는 변함없었지만, 그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깊이를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과거에 가졌던 타인을 향한 날 선 독선과 교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주변의 상처받은 이들을 말없이 품어주는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넓은 품이 생겨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제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만약 저에게 병에 걸리기 전의 안락했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마법의 버튼이 주어진다면, 저는 이제 그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것 같아요. 물론 그 과정은 제 살을 깎아내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 불 속이 아니었다면 저와 함께 걸어오신 예수님을 이토록 깊이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이제야 제 영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짜 자유와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떤 고통의 불길 속을 지나고 계십니까? 사방이 막막하고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은 냉혹한 운명이나 어쩌다 일어난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이 지나고 있는 그 용광로의 온도 조절 장치에 자비로운 손을 얹고, 당신의 영혼이 파괴되지 않도록 미세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불길이 멈추는 날, 여러분은 마음의 불순물이 모두 타버린, 세상 그 무엇보다 눈부시게 빛나는 정금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오늘 하루도 그분과 함께 묵묵히, 그리고 담대히 이 고통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마음 깊이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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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예수와 함께 통과하는 인생의 풀무불, 두란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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