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요약] 조엘 R. 비키의 『고전에서 배우는 기도 특강』 - 믿음의 거장 10인이 들려주는 기도의 진면목

[도서요약] 조엘 R. 비키의 『고전에서 배우는 기도 특강』 - 믿음의 거장 10인이 들려주는 기도의 진면목



무릎으로 하늘의 문을 열었던 거장들을 만나다


당신은 마지막으로 기도의 자리에서 온전한 평안이나, 혹은 거룩한 떨림을 경험한 적이 언제입니까?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문명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갑니다. 신앙생활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우리의 기도는 어느덧 급하게 작성된 요구 서류처럼 하나님 앞에 던져지곤 합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도, 문득 내 영혼의 호흡인 기도가 메말라 가고 있음을 깨닫고 깊은 영적 갈증에 허덕인 적이 있었습니다. 기도가 노동처럼 느껴지고, 허공을 치는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다가올 때, 저는 오래된 믿음의 선조들의 서적을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엘 R. 비키가 정성스럽게 길어 올린 믿음의 거장 10인의 기도 신학을 만났습니다.

이 책, 『고전에서 배우는 기도 특강』은 단순한 기도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안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심연에서 하나님을 대면했던 거장들의 숨결이자, 그들이 치열한 삶의 현장과 핍박 속에서 붙들었던 영적 생명줄에 관한 기록입니다. 칼빈에서부터 에드워즈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다르게 살았던 거장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는 기도의 진면목을 살펴보며, 저는 제 안의 시들어 가던 기도의 불꽃이 다시금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그 따스하고도 강렬한 영적 여정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왜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 기도를 배워야 하는지, 그 위대한 무릎의 신학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풀어내 보겠습니다.



존 칼빈, 거룩한 경외함으로 기도의 법칙을 세우다


종교개혁의 거대한 물줄기를 열었던 존 칼빈의 저작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의 치밀한 논리 뒤에 숨겨진 뜨거운 기도의 심장을 발견하곤 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빈을 냉철한 신학자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그가 평생을 통해 보여준 삶은 기도로 짜인 한 편의 정교한 직물과 같았습니다. 칼빈은 기도를 가리켜 ‘믿음의 주요한 훈련’이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화를 캐내는 도구’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그의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기도의 네 가지 법칙을 묵상하면서, 그동안 내 기도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내 중심적이었는지를 깊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이 제시한 기도의 첫 번째 법칙은 바로 '경외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하나님을 마치 내 요구를 들어주는 비서처럼 대하곤 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기도가 왕 중의 왕이신 창조주 앞에 피조물이 서는 거룩한 예식임을 상기시킵니다. 마음의 정돈 없이, 경외함 없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지적은 내 마음을 무겁게 내리쳤습니다. 두 번째 법칙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깊이 인식하는 '회개와 겸손'입니다. 내 의를 의지해서는 결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참된 기도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법칙은 모든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자기 부인'이며, 마지막 네 번째 법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소망'입니다. 칼빈의 이 네 가지 법칙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외함과 확신, 겸손과 대담함을 정교하게 통합합니다. 내가 이 법칙들을 따라 기도의 노트를 정리하고 한 구절 한 구절 기도를 드려보았을 때, 내 안에서 서둘러 무언가를 얻어내려던 조급함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평안이 차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칼빈이 가르쳐준 기도는 내 영혼의 무게중심을 내가 아닌 하나님께로 옮겨놓는 거룩한 이동이었습니다.



존 녹스, 폭군을 떨게 한 불타는 영혼의 외침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내게 죽음을 주소서!" 이 유명한 기도의 주인공인 존 녹스의 삶을 돌아볼 때,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녹스의 기도는 서재 안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였고, 불의한 시대를 향해 내뿜는 거룩한 불꽃이었습니다. 메리 여왕이 "백만 대군보다 존 녹스의 기도가 더 두렵다"고 고백했던 일화는 그 자체로 기도가 가진 초자연적인 권세를 대변합니다. 나는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며 악한 영적 세력을 떨게 할 만한 기도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녹스에게 있어 기도는 영적 전투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그는 기도를 아군의 진영을 보호하고 원수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영적 대포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가 이토록 강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결코 그의 성격이 불같거나 목소리가 커서가 아니었습니다. 녹스의 기도의 비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를 '돌려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그분의 교회를 위해 부르짖었기에, 그의 기도는 사적인 욕망을 넘어 하늘의 권능을 움직이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나는 녹스의 생애를 연구하며 기도가 단순히 개인의 위로나 내면의 평화를 위한 수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무너진 교회가 다시금 진리 위에 바로 서도록 외치는 거룩한 중보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낙심하고 뒤로 물러서고 싶을 때마다, 나는 녹스의 불타는 기도를 기억합니다. 비록 내 목소리는 작고 약할지라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무릎을 꿇을 때, 영적 어둠의 세력은 반드시 물러갈 것이라는 확신이 내 안에 새롭게 자리 잡았습니다.



존 오웬, 성령의 날개 위에서 드리는 교제의 신학


청교도 신학의 황태자라 불리는 존 오웬의 저작들은 깊고 묵직한 영적 통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룬 그의 글들을 읽을 때면, 나는 마치 거룩한 성소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듯한 경외감을 느낍니다. 오웬은 기도를 단순히 우리가 필요를 아뢰는 행위를 넘어,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 나누는 깊고 친밀한 '교제(Communion)'로 정의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가장 궁극적인 복은 기도의 응답 그 자체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라는 그의 선언은 내 기도 생활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웬은 기도의 동력으로서 성령의 역할을 유독 강조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기도할 힘도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그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오웬에 따르면, 참된 기도는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영적인 열망과 감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 힘과 의지로 기도의 분량을 채우려 할 때 우리는 쉽게 지치고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내 마음을 맡길 때 기도는 자유함과 기쁨의 통로가 됩니다.

나는 서재에서 오웬의 조언을 따라 기도를 시작하기 전, 먼저 가만히 앉아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성령님, 내 마음의 완악함을 깨뜨려 주시고, 내 입술에 합당한 기도의 제목들을 얹어 주소서." 이렇게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나아갈 때, 내 기도는 비로소 이기적인 독백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로 대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오웬이 안내한 삼위일체적 기도는 내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안식하게 만드는 영적 오아시스였습니다.



존 번연, 마음과 영으로 드리는 진실한 고백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평생을 감옥이라는 차갑고 어두운 환경 속에서 보냈지만, 그의 영혼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올랐습니다. 그 자유함의 비결은 바로 그의 탁월한 기도 생활에 있었습니다. 번연은 기도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마음을 쏟아놓는 진실하고 감정 가득한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기도를 철저히 경계했습니다. 서재에 앉아 화려한 미사여구로 채워진 기도문을 읊조리는 것보다, 비록 말은 어눌할지라도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안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내는 기도가 진짜라고 그는 역설했습니다.

번연은 기도의 외적인 형식보다 '마음의 진실함'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서구 교회의 전통적인 기도서들에 의존한 형식적인 기도가 자칫 영혼을 잠들게 만드는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기도는 정형화된 틀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연약함, 두려움, 의심, 그리고 슬픔까지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번연 자신이 감옥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며 겪었던 뼈저린 외로움과 고통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가식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직 은혜만을 구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번연의 글을 읽으며 내 기도에 묻어 있던 불필요한 종교적 수식어들을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목회자로서 체면 때문에, 혹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그럴듯한 문장으로 기도를 포장했던 부끄러운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번연은 내게 기도의 자리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솔직해져도 괜찮다고 위로해 줍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나 지쳐 있습니다. 제 안에 믿음이 부족합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이 짧고 투박한 한마디가 내 영혼의 깊은 바닥을 치고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진실한 고백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따스한 품으로 안아주셨습니다.



매튜 헨리, 말씀의 언어로 기도를 직조하다


성경 주석의 대가인 매튜 헨리를 떠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찬 그의 풍성한 기도의 문장들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평생 성경을 연구하며 축적된 지식을 지성 영역에만 가두어두지 않고, 그것을 고스란히 기도의 언어로 승화시켰습니다. 헨리는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성경의 언어를 기도의 언어로 삼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조석으로 변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의 가장 견고하고 풍성한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가 제안한 '말씀을 따라 기도하는 방법(Praying the Bible)'은 내 기도 생활에 엄청난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과거에는 기도를 오래 하다 보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 일쑤였는데, 성경 본문을 펼쳐놓고 그 구절들을 기도로 바꾸어 드리기 시작하자 기도의 지경이 무한히 넓어졌습니다. 예컨대 시편 23편을 읽으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말씀을 "주님, 오늘 내 삶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내 영혼의 모든 결핍을 채워주소서"라는 기도로 바꾸어 드리는 식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맥락을 따라 드리는 기도는 내 주관적인 감정의 기복에 휘둘리지 않게 해 줍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영적으로 메마를 때나 충만할 때나,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기도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나침반이 되어 줍니다. 헨리의 가르침 덕분에 내 서재의 책상 위에는 항상 펼쳐진 성경과 기도의 수첩이 나란히 놓이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기도를 직조하는 이 거룩한 습관은, 성경이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내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미학적 기도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자 천재 사상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흔히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으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가장 역동적으로 맛보는 자리가 바로 기도였습니다. 에드워즈에게 기도는 의무감으로 행하는 종교적 규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찬란함에 매료되어 드리는 기쁨의 찬가였습니다. 나는 그의 기도론을 접하며, 기도가 이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경험이 될 수 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에드워즈는 기도를 통해 성도가 누리는 '영적 감각(Spiritual Sensation)'을 이야기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듯, 중생한 영혼은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영적으로 '맛보고 알아가게' 됩니다. 그는 종종 홀로 숲속을 거닐며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고 눈물로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무언가를 요구하여 얻어내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를 즐거워하고 그분과 연합하는 미학적 신비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내 기도가 왜 그토록 건조했는지 돌아보니, 내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영적 눈열림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나는 에드워즈의 안내를 따라 내 기도의 초점을 내 필요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의 첫 시간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찬양하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묵상하는 데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나이다." 이러한 기도는 내 마음의 시야를 넓혀주었고, 세상의 작은 염려들에 연연하던 나를 고결한 영적 고지로 끌어올려 주었습니다. 에드워즈가 보여준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잠기는 복된 경험이었습니다.



토마스 브룩스, 은밀한 골방에서 만나는 하늘의 위로


청교도 목회자 토마스 브룩스는 성도들의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는 데 탁월한 처방전을 가졌던 목자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은밀한 기도(Secret Prayer)'의 가치를 깊이 역설했습니다. 브룩스는 마태복음 6장의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성도의 영적 건강은 바로 이 은밀한 골방 기도의 유무에 달려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군중 속에서 드리는 공중 기도가 우리의 종교적 평판을 높여줄 순 있을지언정, 우리 영혼의 진짜 실력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앉아 있을 때 드러난다는 그의 지적은 내 뼈를 때리는 듯했습니다.

브룩스는 골방 기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비밀 서재'이자 '영혼의 안식처'라고 불렀습니다. 사탄은 성도가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온갖 분주함과 잡념으로 골방의 문을 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러나 일단 모든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은밀한 자리에 앉아 하나님을 대면할 때, 그곳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치유의 은혜가 흘러나옵니다. 나는 내 삶 속에서 진정한 '골방'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공간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의 중심에 세상의 소음을 끄는 영적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하루 중 단 30분이라도 모든 디지털 기기를 끄고, 서재의 문을 잠근 채 가만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공중 기도에서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깊은 속마음의 상처와 은밀한 죄악들을 고백할 수 있었고, 그 고백의 끝에서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브룩스가 가르쳐준 은밀한 기도는 분주한 현대 사회 속에서 영혼의 중심을 잃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최고의 영성 훈련이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 영원의 관점으로 오늘을 기도하다


『참된 목자』의 저자 리차드 백스터는 평생을 극심한 육체의 질병과 고통 속에서 보냈지만, 그의 영적 시선은 언제나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내게 한 그의 기도의 정수가 담긴 책입니다. 백스터에게 기도는 '영원(Eternity)'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기도할 때 이 땅의 잠시 잠깐의 안락함에 매몰되지 말고, 장차 다가올 영원한 천국의 영광과 안식을 미리 맛보며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백스터의 이러한 영원 지향적 기도는 내 얕은 신앙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종종 눈앞의 고난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혹은 당장의 현실적 영토가 넓어지기만을 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백스터는 고통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현재로 끌어당겼습니다. 그는 하루의 일정 시간을 떼어 장차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상하며 묵상하고 기도하는 '천국 묵상의 기도'를 실천했습니다. 이 기도는 육신의 연약함과 핍박이라는 환경적 감옥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힘을 그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나는 백스터의 조언을 따라 기도의 마무리에 항상 영원을 묵상하는 시간을 넣었습니다. "주님, 이 땅의 삶은 나그네 길에 불과함을 고백합니다. 내 눈을 들어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게 하소서." 이렇게 영원의 관점으로 기도를 드리고 나면, 나를 괴롭히던 현실의 문제들이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영원을 품은 기도는 오늘의 고난을 견뎌낼 힘을 주며, 우리로 하여금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으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영적 영양분이었습니다.



존 코튼과 토마스 셰퍼드, 언약과 순결로 드리는 연합의 기도


미국 뉴잉글랜드 청교도 역사의 초석을 다진 존 코튼과 토마스 셰퍼드는 성도의 삶 속에서 기도가 어떻게 공동체와 내면의 순결을 지켜내는지를 보여준 인물들입니다. 존 코튼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기도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신실한 언약이 신자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법적 근거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내 열심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고 그분의 언약적 자비를 호소하는 자리입니다. 코튼의 지도를 받으며 나는 내 공로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과 언약만을 의지해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편 토마스 셰퍼드는 '정결함과 자기 성찰'의 기도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내면에 숨겨진 미세한 죄악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영적 장애물이 됨을 예리하게 간파했습니다. 셰퍼드의 기도는 늘 철저한 자기 부인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동자 앞에서 자신의 동기와 목적을 점검하며, 영혼의 찌꺼기들을 기도의 불로 태워버렸습니다. 그의 철저함은 자칫 율법주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분과의 관계에 티끌 하나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순전한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이 두 거장의 가르침은 내 안에서 멋지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코튼을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언약적 사랑 안에서 담대함을 얻었고, 셰퍼드를 통해 그 사랑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날마다 내 내면을 살피는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언약의 닻을 내리고 순결의 도를 구하는 이들의 기도는, 내 신앙생활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게 막아주고, 동시에 정죄감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든든한 좌우의 날개가 되어 주었습니다.



위대한 무릎의 유산을 이어받다


지금까지 우리는 조엘 R. 비키가 안내한 믿음의 거장들의 찬란한 기도 세계를 단숨에 거닐어 보았습니다. 칼빈의 거룩한 경외함, 녹스의 불타는 외침, 오웬의 성령 안에서의 교제, 번연의 진실한 마음, 매튜 헨리의 말씀의 언어, 에드워즈의 영광스러운 미학, 브룩스의 은밀한 골방, 백스터의 영원한 시선, 그리고 코튼과 셰퍼드의 언약과 순결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들려준 기도의 진면목은 내 메마른 서재를 거룩한 눈물과 감격의 성소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거장들의 글을 덮으며, 나는 그들의 공통점이 결코 타고난 영웅적 기질이나 특별한 환경에 있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연약한 인간들이었고,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더 혹독한 고난과 영적 어둠 속을 걸어갔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오직 무릎으로 하늘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쉬지 않고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기도는 취미나 교양이 아닌, 영혼의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생명선이었습니다.

이제 책장을 덮고, 이 위대한 무릎의 유산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내야 할 때입니다. 그들의 기도를 책으로 읽고 감탄하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지적 유희에 불과할 것입니다. 비록 서툴고 느릴지라도, 오늘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거장들이 걸어갔던 그 기도의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서재의 소음을 줄이고, 골방의 문을 닫고, 말씀을 펼쳐 들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봅시다.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영혼을 거룩한 거장들의 숨결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는 언제나 열려 있으며,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신실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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